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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xxx년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통칭 크리스마스(Christmas). 길게 설명하긴 했으나 크게 종교가 있는 것이 아닌 저에게는 그냥 넘어갈 하나의 큰 기념일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평소처럼 스승님이나 동료들과 함께 임무를 하거나 수련을 하며 보냈을 나날이라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
"그러니까 '강제 휴가'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어제 이브 날에도 임무 다녀온 요원들은 전부 휴가령이 내려왔어요. 물론 이미 휴가 다녀온 나머지 요원들이 오늘 할당된 임무를 뛰기로 했으니 걱정말고 푹 쉬다와요. 아, 젠야타는 소식 듣고 오랜만에 수도원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더군요. 겐지, 그러니까 쉬다 오세요."
"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사님."
"뭘요."
뜻밖의 여유였다. 항상 이맘 때 쯤이면 한창 바쁠 때여서 휴가라는 개념이 잘 없었는데 안정기로 접어든 상태여서 그런가. 모처럼 난 시간이고 스승님도 없으니 수련보다는 확실히 쉬고 오는 것이 나을 터였다. 크리스마스라. 확실히 오늘 광장이 조금 시끌벅적하긴 했던 것 같다. 의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으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성탄절을 맞이한 지 얼마나 됬지. 스승님과 수도원에서 지낼 때에는 그런 개념이 잘 없었으니까. 오히려 봉사를 간다면 몰라도. 제 방에 들러서 혹시나를 위한 단검 한 자루와 최소한의 무기를 지닌 채로 가볍게 외출복을 껴입었다. 추위를 타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모습으로 광장을 돌아다니기엔 꽤나 주목받으니까. 기왕 나가게 되는 것이니 편하게 즐기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는 김에 선물도 몇 개 사오도록 하고. 대충 채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섰다. 평소 가던 길목이 아니라 약간 낯선 기분이 저를 맴돌았지만 몇 번 본 적은 있으니 미아가 되진 않을 것이다.
거리는 예상과 같이 사람과 옴닉들로 붐볐다. 제 걱정과 달리 저에게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제각기 자신의 소중한 이들에게 관심을 쏟느라 바빠 보였다. 슬쩍 사람들 틈을 교묘히 지나서 광장 중앙의 빈 벤치에 착석했다. 임무에 비하면 힘든 축에도 들지 않았으나 오히려 지치는 기분이었다. 사람에 치인다니 정말로 드문 일이 아닐까 했다. 뒤에서 작게 캐롤이 들려오고 형형색색으로 꾸며놓은 트리는 확실히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조금은 자신은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이 상황에서 분명 배경에 녹아들었음을 자각하고 있지만 특유의 기시감은 어쩔 수 없었다. 즐기려고 나온 것이지만 도리어 불편한 느낌을 떨치기 힘들었다.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려는 것을 조금 가다듬고 있는데 무언가 제 앞에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아저씨, 혼자에요?"
".....그렇다."
"크리스마슨데 왜 혼자에요? 가족은 없어요?"
"..누구랑 같이 보내러 온 것은 아니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가족은 어디에 있지?"
"저기에 있으니까 걱정마요. 그럼 혼자 온 거에요? 내가 선물 하나 줄까요?"
"됬으니 가족에게 주도록 해. 인파가 많으니 얼른 돌아가라."
"매정하긴. 그냥 받아요. 아저씨 쓸쓸해 보여서 그래요."
냅다 제 손에 예쁜 빛깔의 장미 한 송이를 쥐어주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금색 리본이 곱게 매여진 잘 핀 한 송이. 물기를 머금은 것이 생기가 넘쳐 흘렀다. 별 것 아닌 꽃 한 송이일 뿐인데도 그럭저럭 기분이 나아진 듯 했다. 쓸쓸해보인다라.
심기가 불편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었나. 어린 아이가 알아볼 정도면 수련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들린 장미를 작게 돌려보고있는데 코 끝이 살짝 차가웠다. 고개를 들었더니 눈송이가 아롱지듯 하늘을 채우고 있었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까맣게 구름이 낀 하늘에서 희고 보송보송한 눈송이가 내려오는 것을 그저 가만히. 흔히들 이 풍경을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하던가.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운이 좋게도 한 번 즐기는 크리스마스 휴가가 이렇게 장식되는구나. 그러고보니 하나무라도 지금 이렇게 눈이 올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가볍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토록 무거운, 제 마음 속의 흉터였는데.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깊숙히 들이쉬고 느리게 내뱉었다. 아까 장미를 주고 간 아이가 있다면 한 번 물어보고 싶은데. 지금의 자신도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냐고. 무슨 자신감인지는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에 쌓이는 눈을 살짝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기왕의 휴가인데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 여러모로 혼이 나겠지. 스승님도 자리를 비우셨지만 저녁에 오실 것이고 박사님 또한 본부에 계실 요량인 것 같으니 둘러보고 작게나마 크리스마스 파티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보다는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더욱 기쁘고 보람찬 휴가가 될 것이다. 손에 들린 장미에 닿아 녹아드는 눈송이를 살짝 닦아내고 다시 소중하게 잡아들었다.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을 받게 되어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것이라고 생각하자. 나올 때 지었던 표정과 달리 훨씬 밝아진 얼굴로 다시 캐롤이 들리는 거리로 들어갔다. 선물은 무엇이 좋을까. 파티는 뭐를 준비하는 것이 좋으려나. 만약 거리를 지나다가 아까 그 아이를 본다면 자신도 작게 마음에 들만한 것을 찾아 하나 선물로 주자고 다짐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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